문화원 상담전화
031.982.1110
월-금 : 9:30 ~ 17:30, 토/일/공휴일 휴무
점심시간 : 12:00 ~ 13:00
페이스북 트위터 google+ 카카오스토리 네이버 밴드

제목 중봉 조헌(趙憲)
등록일 2018-09-20 조회수 743


중종 39(1544)선조 25(1592)

조선 문신, 의병장. 자는 여식(汝式). 호는 중봉(重峯)후율(後栗), 본관은 백천(白川), 응지(應祉)의 아들이고 율곡우계의 문인이다.

1.생 애
명종 10(1555) 12세 때 김황(金滉)에게 시서(詩書)를 배웠는데, 집이 몹시 가난해서 추운 겨울에 옷과 신발이 다 해어졌어도 눈바람을 무릅쓰고 멀리 떨어진 글방 가는 것을 하루도 쉬지 않았으며, 밭에 나가 농사일을 도울 때나 땔감을 베어 부모의 방에 불을 땔 때에도 책을 손에서 떼지 않았다고 한다.
1565년 성균관에 입학하였으며, 1567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선조 1(1568) 처음으로 관직에 올라 정주목파주목홍주목의 교수를 역임하면서 사풍(士風)을 바로잡았다. 1572년부터 교서관의 정자저작박사를 지내면서, 궁중의 불사봉향(佛寺封香)에 반대하는 소()를 올려 국왕을 진노하게 하였으며, 성절사(聖節使) 박희립(朴希立)의 질정관(質正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와 <동환봉사(東還封事)>를 지어 올렸다.
1575년부터 호조좌랑예조좌랑성균관전적사헌부감찰을 거쳐, 경기도 통진현감(通津縣監)으로 있을 때, 내노(內奴)의 횡행죄를 엄히 다스리다가 죽인 죄로 탄핵을 받아 부평으로 귀양갔다가 3년 만에 풀려났으며, 다시 공조좌랑전라도도사종묘서령(宗廟署令)을 역임하였다.
1582년 계모를 편히 모시기 위하여 자청하여 보은현감으로 나가는 동안, 그 치적이 충청좌도에서 으뜸으로 손꼽히었으나, 대간의 모함에 따른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다가, 다시 공주목제독(公州牧提督)을 지냈다.
1587년 동인 정여립(鄭汝立)의 흉패함을 논박하는 만언소(萬言疏)를 지어 현도상소(縣道上疏)하는 등 5차에 걸쳐 상소문을 올렸으나 모두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며, 다시 일본사신을 배척하는 소와 이산해(李山海)가 나라를 그르침을 논박하는 소를 대궐문 앞에 나아가 올려 국왕의 진노를 샀다.
관직에서 물러난 뒤에는 옥천군 안읍밤티(安邑栗峙)로 들어가 후율정사(後栗精舍)라는 서실을 짓고 제자 양성과 학문을 닦는 데 전념하였다.
1589년 지부상소(持斧上疏)로 시폐(時弊)를 극론하다가 길주 영동역(嶺東驛)에 유배되었으나 이해 정여립의 모반사건으로 동인이 실각하자 풀려났다.
1591년 일본의 도요토미(豊臣秀吉)가 겐소(玄蘇) 등을 사신으로 보내어 명나라를 칠 길을 빌리자고 하므로, 조정의 상하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을 때, 옥천에서 상경, 지부상소로 대궐문 밖에서 3일간 일본사신을 목벨 것을 청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5924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옥천에서 문인 이우(李瑀)김경백(金敬伯)전승업(全承業) 등과 의병 1,600여명을 모아, 81일 영규(靈圭)의 승군(僧軍)과 합세하여 청주성을 수복하였다.
그러나 충청도순찰사 윤국형(尹國馨)의 방해로 의병이 강제해산 당하고 불과 700명의 남은 병력을 이끌고 금산으로 행진, 영규의 승군과 합진하여, 전라도로 진격하려던 우세한 고바야가와(小早川隆景)의 왜군과 818일 전투를 벌여 끝까지 분전하다가 중과부적으로 모두 전사하였다. 후세에 이를 금산전투라 일컬어 숭모하게 되었다.
1604년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1등으로 책록되고, 영조 10(1734)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고종 20(1883) 문묘에 배향되고, 옥천의 표충사(表忠祠), 배천의 문회서원(文會書院), 김포의 우저서원(牛渚書院), 금산의 성곡서원(星谷書院), 보은의 상현서원(象賢書院) 등에 제향되었으며, 1971년 금산의 순절지 칠백의총이 성역화되었다. 시호는 문열(文烈)이다.

2.관련사건
(1) 금산싸움
임진왜란이 교착상태에 들어가 강화를 교섭하던 중 왜군의 일부는 전라도 금산에 주둔하여 크게 세력을 떨쳤으며, 의병들이 이들을 치다가 여러 번 패하였으나 의병장 조헌은 승장 영규(靈奎)와 함께 관군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700여 명의 의병을 거느리고 단독으로 금산성 밖 10리 되는 곳까지 진격하였다.
후속부대가 없는 것을 알아차린 성내의 왜군은 군대를 몰래 뒤로 보내어 길을 차단하는 한편, 좌우에서 포위하고 공격하였다. 병력수의 열세로 조헌영규 이하 전원이 전사하였다.
이때 전사한 700의사의 무덤을 금산 칠백의총(錦山七百義塚)’이라고 한다.
(2) 청주성 싸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충청도 서남지역에 1,600명의 의병을 모은 조헌은, 선조 25(1592) 7월 하순 청주성 교외에서 승장(僧將) 영규(靈圭)가 이끄는 약 1,000명의 승병과 방어사(防禦使) 이옥(李沃)500관군을 거느리고, 81일 하치스카 이에마사[蜂須賀家政]가 지휘하는 왜군이 점령하고 있던 청주성을 공격하였다. 이날 종일 계속된 치열한 공방전 끝에 왜군은 밤 사이에 성을 버리고 퇴각했다.

3.조헌에얽힌일화
의병의 선봉장으로 왜군과 싸우다 7백 의사와 함께 장렬히 순국(殉國)하신 중봉선생은 김포읍 감정리에서 출생한 분이다.
이 분은 어려서 집은 가난했지만 글공부를 하고 싶어서 이웃 동네의 글방에 다녔다. 서당에 가려면 도중에 여우재고개라는 고개를 넘어서 다녀야 하는데, 하루는 서당을 가느라고 이 고개를 넘어가는데 예쁜 처녀가 나타나더니 중봉선생을 껴안고 입을 맞추었다.
그런 일이 있은 후로는 날마다 그 처녀가 나타나서 입을 맞추곤 했는데, 하루는 서당선생이 중봉선생을 보고서 너는 어째서 얼굴에 화색이 없고 병색이 되어 가느냐? 너 요새 무슨 일이 생긴 게 아니냐?”하고 물었다. “아니요, 아무 일도 없습니다. 저는 모르겠습니다하고 중봉이 대답했다. 그러나 서당 선생은 재차 너 서당에 오는 도중에서 이상한 일을 당하지 않았느냐?” 고 다그쳐 물었다. 이에 중봉이 , 있었습니다. 서당에 오느라고 고개를 넘노라면 예쁜 처녀가 나타나서 강제로 입을 맞추곤 했습니다.”
선생은 이 말을 듣고 그 처녀하고 입 맞출 때, 그 처녀가 무슨 구슬 같은 것을 네 입에다 넣었다가 다시 제 입으로 가져가지 않더냐?”하고 물었다. 중봉이 그랬습니다.”고 하니까 선생은 여우가 둔갑한 처녀인데 그 여우가 네 정기를 빼앗아가느라고 그러는 것이다. 그러니 다음에 입을 맞추고 구슬을 네 입에 넣거든 입을 꽉 다물고 돌려주지 말고 거기서 쏜살같이 뛰어오너라하고 일렀다.
중봉은, 선생이 이른 대로 그 처녀가 입을 맞추고 넣어 준 구슬을 입에 문 채 처녀를 떠밀고는 달려오려고 했다. 그랬더니 처녀는 중봉을 붙잡고 구슬을 도로 빼앗으려고 달려들었다. 중봉이 뺏기지 않으려고 둘이 한참 옥신각신 하다 중봉이 그 구슬을 삼켜 버렸다.
그랬더니 처녀는 흰여우로 변해서 슬피 울며 숲 속으로 사라졌다. 그러고 나서, 중봉이 서당에 갔더니 선생이 그 구슬을 가져왔거든 내어놓으라고 했다.
중봉이 여우에게 그 구슬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옥신각신하다가 삼켜버렸습니다하고 말하니, 선생은 어허, 아까운 보배가 없어졌구나, 너는 그 구슬을 삼켰으니 지리(地理)는 훤히 알지만 천문(天文)은 모르게 될 것이다.” 이렇게 말하고 그 처녀는 원래 여우인데 사람의 정기를 빼앗아 먹고 사람이 되려고 너한테 달려들어서 네 정기를 빼앗아 먹던 중이었다. 그것이 안 되어 여우로 되돌아간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 중봉이 자라 어른이 되었을 때, 통진 앞 바다에 난데없이 대팻밥이 떠밀려오므로 사람들이 중봉선생께 무슨 징조인가 물었다. 중봉이, 그것을 왜놈들이 우리 조선을 침략하려고 수 없이 배를 만드느라고 대패질 한 그 대패밥이 우리 조선에까지 흘러와서 그렇다고 말했다. 중봉이 그 여우 구슬을 삼켰기 때문에 지상에서 일어나는 일은 모두 환히 알 수 있었던 것이다. 그 후 몇 년 안 가서 아니나 다를까 왜구가 조선 땅을 쳐들어와서 온 나라가 잿더미가 되고 말았다.

4.저 서
<중봉집(重峯集)>
활자본. 2010. 규장각도서장서각도서국립중앙도서관 소장. 초간본은 조헌이 순절한 지 22년 뒤인 광해군 5(1613)에 동학과 의병동지인 안방준(安邦俊)이 그의 유문(遺文)과 사적을 수집편찬하고, 이정구(李廷龜)의 서문과 강항(姜沆)안방준의 발문을 붙여 15년에 발간하였다. 그 뒤 영조 16(1740) 원집(原集) 13, 부록 7, 도합 2010책으로 간행되었다.
숙종 24(1698) 왕명으로 <동환봉사(東還封事)><항의신편(抗義新編)>을 종합간행하였으며, 그 이전에는 책명이 <유적(遺蹟)>, <유고(遺稿)>, <선우록(先憂錄)>으로 되어 있던 것을 <중봉집(重峯集)>으로 통합, 일원화하였다. 이 문집은 간기(刊記)로 보아 1740년 왕명에 따라 간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조천일기(朝天日記)>
조헌이 1574511일부터 825일까지 약 4개월 동안 성절사(聖節使)의 질정관(質正官)으로 명나라를 다녀온 후에 쓴 일기체의 견문록.
3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당시의 정사(正史)는 박희립(朴希立), 서장관(書狀官)은 허봉()이었다. 청나라에 사행한 일기류를 조선 초기에는 봉사록(奉使錄)점마록(點馬錄)부경일기(赴京日記), 중종대 이후에는 조천록(朝天錄)조천일기 등으로, 인조대 이후에는 심양록(審陽錄)북행록(北行錄) 등으로, 효종 이후에는 연행록(燕行錄) 등으로 불렀다. 이 책은 강()과 목()을 구분하여 본문과 소주(小注)를 두었으며, 상권은 주로 입궐까지의 기행, 중권은 베이징[北京]에서의 생활, 하권은 명나라 조정의 소식인 중조통보(中朝通報)로 구성하였다. 하권의 말미에는 연물(撚物)석유(石油) 23개 물명에 대한 간략한 해설이 있고, 이 책이 간행된 경위를 적은 민진원(閔鎭遠)의 발문이 있다.
 
<동환봉사(東還封事)>
목판본. 11. 규장각도서. 제목은 우리 나라에 돌아와서 밀봉하여 임금에게 올리는 글이라는 뜻이다. 이 책은 조헌이 선조 7(1574) 명나라 신종(神宗)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하여 파견된 성절사(聖節使)의 질정관(質正官)으로 중국을 다녀온 뒤, 조선에서도 시행되었으면 하는 것을 상소로 초한 것을 묶은 것이다.
이 책은 두 부분으로 구성되었는데, 앞부분은 8조로 된 소가 수록되어 있다. 1조는 중국의 공자를 비롯한 유현들의 추숭과 배향을 소개하며, 한국의 김굉필(金宏弼)조광조(趙光祖)이언적(李彦迪)이황(李滉) 등을 문묘에 배향하자는 성묘배향(聖廟配享)’을 논한 글이다. 2조는 내외서관(內外庶官)’으로 관원 임면제도의 개선에 관한 글이며, 3조는 의관제도를 논한 귀천의관(貴賤衣冠)’이고, 4조는 검소한 식생활을 관원들이 먼저 지켜야 한다는 식품연음(食品宴飮)’이다. 5조는 사대부가 서로 접대하는 예에 대해 논한 사부읍양(士夫揖讓)’이고, 6조는 스승과 제자 간에 접대하는 예에 대하여 논한 사생접례(師生接禮)’이다. 7조는 향촌의 풍속을 순화시키는 데 대한 향려습속(鄕閭習俗)’을 논하고, 8조에서는 군사기율(軍師紀律)’을 논하였다.
조헌은 위의 8조 소와 질정록(質正錄) 1편을 선조에게 바치며, ‘우리 나라에도 명나라 제도를 그대로 준행해야 한다고 하였다. 이에 선조가 상소문에 대해 비답(批答)하기를, ‘수천 리 밖이라 풍속이 같지 않는데, 만일 풍기(風氣)와 습속의 다름을 헤아리지 않고 억지로 행하려고 하면 한갓 세상을 놀라게만 하고 일은 맞지 않는 바가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조헌은 자신의 주장이 끝내 받아들여지지 않자 뒷부분에 수록된 16조의 상소문은 올리지 않았다.
조헌은 그대로 명나라 제도를 본받아 시행하는 데에만 그 뜻을 두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 3()의 정치를 만회해 보려 했다고 한다. 책 끝에는 안방준의 발문(跋文)이 있다.
 
<항의신편(抗義新編)>
조선 선조 때의 문신의병장 조헌(趙憲)의 유문(遺文) 및 행록(行錄)을 수록한 책.
목판본. 42. 광해군 때 안방준(安邦俊)이 편찬, 광해군 11(1619) 판각(板刻)에 착수, 1621년에 완성해 인조 3(1625) 발행하여 광포(廣布)하였다. 내용은 조헌의 봉사(封事 : 왕에게 올리는 비밀상소문)로 청절왜사봉사(請絶倭使封事)청참왜사봉사(請斬倭使封事) 등 여러 가지 글을 실었으며, 책머리에 궁경양친도(躬耕養親圖) 이하 8도를 첨부하여 그 뜻이 있는 곳을 명백하게 하였다. 편자 안방준의 서문과 발문이 있다. 현전본은 철종 14(1863)의 중간본으로, 같은 해에 쓴 송내희(宋來熙)의 중간발(重刊跋)과 송근수(宋近洙)의 발문이 있다. 이 책은 임진왜란을 연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이다.
저서 : <重峯集>, <重峯東還封事>
문헌 : <宣祖實錄>, <亂中雜錄>, <實齋史草>, <大庵集>, <海東名臣錄>, <韓國人名大事典>
 
 
이전글 눌재 양성지(梁誠之)